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보이아 가문 (문단 편집) === [[사르데냐 왕국]]의 수립(1720)과 안정화(18~19세기 중반) ===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초창기에 [[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]]는 부인인 오를레앙의 안 마리(Anne-Marie d'Orléans)가 프랑스 국왕 [[루이 14세]]의 조카였던지라 프랑스 편을 들었지만, [[합스부르크 제국]]의 명장이자 같은 가문 출신의 [[사부아 공자 외젠]][* 외젠의 아버지인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의 아버지는 앞서 말한 토마소 프란체스코로,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사부아 공자 외젠은 6촌 관계였다.]이 [[황제군|오스트리아군]]을 이끌고 참전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편을 들었고, [[위트레흐트 조약]]을 통해 [[시칠리아 왕국]]을 양도받아 시칠리아 국왕을 칭하였다. 하지만 [[스페인 국왕]] [[펠리페 5세]]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상실한 이탈리아 반도의 스페인 영토 탈환과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외치며 [[시칠리아]]를 침공해 점령하자 [[사국 동맹 전쟁]]이 일어났다.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를 탈환했는데 이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[[사르데냐]]의 국왕이었던 [[카를 6세]]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바꾸자고 제안하였고[*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반강제로 바꾸자고 협박한 것이다.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[[밀라노 공국]], [[나폴리 왕국]], 사르데냐를 얻었는데 나폴리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보다는 가까운 시칠리아가 통치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.],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를 얻어 1720년 국호를 [[사르데냐 왕국]](Regno di Sardegna)으로 개칭하였다. 당시 사보이아 공국은 [[신성 로마 제국]]의 라인강 상류 관구(Oberrheinischer Reichskreis)와 명목상의 [[부르군트 왕국]]의 일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,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위치한 [[프로이센 공국]]을 획득해 [[프로이센 왕국]]으로 개칭한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과 비슷하게 사르데냐 왕국을 칭했다. [[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]]는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내려온 생존 전략을 활용하여 프랑스-스페인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[[합스부르크 왕조]]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1748년 [[아헨|엑스라샤펠]] 조약으로 사르데냐 왕국을 스페인 부르봉 왕조,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3등분하는 주요 세력으로까지 성장시켰다. 하지만 [[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]]가 [[프랑스 혁명]] 정신으로 뭉친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해 니차와 사보이아를 빼앗겼고, [[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]]가 1802년 피에몬테까지 상실하면서 사르데냐의 [[칼리아리]]로 [[몽진]]하여 피난생활을 했다.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양위로 즉위한 동생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]]가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으로 니차, 사보이아, 피에몬테를 모두 되찾으면서 토리노로 돌아와 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(Regno di Sardegna-Piemonte)으로 국호를 개칭하였고 이듬해 [[빈 회의]]에서 옛 [[제노바 공화국]]의 영토인 [[리구리아]] 지역까지 획득하였다. 1831년에 [[카를로 펠리체]]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[* 카를로 펠리체의 왕비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(Maria Cristina di Borbone-Napoli)가 불임이었다.] 사보이아 본가의 대가 끊기고, 카를로 펠리체와 13촌 관계였던 사보이아-카리냐노 가문의 [[카를로 알베르토]]가 새 국왕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